0~10
1995년 11월 21일 13:14분 서울 중곡동 내가 태어난 날과 시간과 장소이다.
지금 생각나는 어렸을 적 내 기억, 대략 초등학생 까지 나의 기억은 좋은 아이는 아니었고 나쁜 짓을 많이 했었다.
내 가정은 화목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별로 많지 않지만 큰 사건들을 추려서 적어보자면,
아빠가 엄마의 목을 조르는 것도 봤으며, 둘은 항상 싸웠다.
아빠는 항상 술을 마시며 집에 들어왔고 엄마는 잔소리를 하고..
서울에서 살며 디지몬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집에서 병아리를 키웠지만 몇 마리는 놀다가 잃어버렸다.
그때 나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었다. 그냥 잃어버렸구나.. 생각하고 끝이었다.
높은 미끄럼틀 위에서 바닥으로 점프하는 용감함(?)도 있었고, 5살이었나? 가족과 함께 장을 보러 갔다가 가족을 잃어버려서
혼자 집에 찾아 갔던 기억이 있다. 차 타고도 10~20분 거리였는데 혼자서 울면서 잘 갔다가 집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없었고 다시 마켓으로 가는 길
가족과 다시 재회했었다. 그들도 나를 애타게 찾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 날은 친구 집에서 손오공 게임을 하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져
머리를 다쳤고, 피가 흘렀던 기억이 있는 데.. 난 그때 역시 차분했었다. 울지 않았고 피가 나는 구나.. 하고 경비 아저씨에게 갔었고 엄마를 기다린 기억이 있다.
병원에서 머리를 꿰맸고 난 아무렇지 않았었다. 태권도를 다닐 때 무단 횡단을 하다가 달리는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가 있었고 난 영화처럼 몇 바퀴 바닥을 굴렀다.
난 어디도 아프지 않았고, 무덤덤 했다. 엄마 친구가 마침 그 자리에서 날 봐서 여러가지 조치를 했던 거 같은데.. 난 그때 괜찮다며 그냥 걸어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학생이 된 후 2학년에 난 의정부로 이사를 갔다.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좋아하는 여자도 생겼었으며 나쁜 짓도 많이 했다.
친구 딱지나 게임기를 훔치기도 했고.. 돈도 훔쳤고.. 홈플러스에서 게임 CD 를 훔치다가 걸려서 엄청 혼난 기억이 있다.
친구 한 명을 무리에서 따돌리기도 했으며, 그 친구를 울리기도 했었다. 친구들과 장난감 총을 쏘다가 차 창문도 깼고..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아이였다.
내 가족은 이 당시에도 화목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따로 살았고, 외할머니 장례식이 끝난 후 엄마는 아빠에게 나를 데려가라고 했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거나, 엄마의 말에 따르지 않을 때 엄마는 내게 아빠를 닮았다고 뭐라고 했었다..
누나와 역시 항상 싸웠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내가 칼을 들었었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난 싸이코패스가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6학년 , 우리는 의정부 드림벨리라는 아파트에서 벽산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초등학교까지 엄청 멀었는데 매일 등교,하교 40분을 넘게 걸었었다.
10대
중학교에 입학 후
그 곳엔 서열이란 것이 존재했다. 중학생에 난 남,녀 가릴 것 없이 정말 잘 놀았었다..
함께 계곡을 가기도 하고, 노래방도 가고, 생일 파티도 하고.. 내게 맞는 친구들과 놀다 보니까 난 자연스레 잘 나가는 친구들과 멀어졌다.
애초에 가까이 있던 적이 있긴 했었나..? 어쨌든, 높은 서열에서 멀어졌지만 난 따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들과 아예 안 어울린 건 아니었다.
가끔 대화도 하며 놀기도 하였지만 뭔가 그들과는 큰 거리가 느껴졌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와 돌 던지며 놀다가 눈에 맞아 시력을 많이 잃었고, 피가 눈 앞을 가렸다. 그때 처음 난 실명 될까 무서움에 울컥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존재한다. 난 싸움을 싫어했고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는 날 밑으로 봤던 것 같다.
이 시점부터 나도 모르게 서열, 갑과 을 이란 개념을 많이 싫어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도 힘이 세기로 유명했고, 싸움을 잘 하는 친구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놀다가 그 친구가 빡쳐서 날 때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친구의 마지막 소식은 20살이 넘어 어떤 사이비에 가입했다고 들은 게 전부이다.
중학생때의 난 친구들 반 친구들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아이돌을 잠깐 꿈 꿨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중학교 친구들에게 어떤 사이트 낚시를 당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까발려졌었다.
이 시점부터 난 내 행동에 조심성을 갖추기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에 앞서 내 성적은 바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의정부 공업 고등학교 를 선택했고 ‘컴퓨터 응용 기계과’ 에서 컴퓨터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 과를 선택했었다. 결과론 적으로 컴퓨터는 무슨.. CNC, 밀링, 선반 이런 걸 다루는 곳이었다.
내 중학교 친구 몇 몇 애들도 함께 갔다. 친구 따라서 간 게 아닌 각자의 선택이었지만 몇몇 애들이 같은 과를 선택했고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고등학교에선 서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모르게 존재했나? 난 잘 모르겠지만 난 모두가 다 재밌게 놀았었던 거 같다.
함께 셔플을 추기도 했고, 농구도 했고, 피시방도 가고..
고등학교 1학년
난 의정부 공업 고등학교가 꼴통 양아치 학교라는 말에 겁이 났었다.
그렇지만 내 예상과 달리 모두가 착했다. 물론 자퇴한 친구도 있고 학교를 안 나와서 강제 퇴학 당할 뻔한 친구도 있고.. 마음은 전부 착한 애들이었다.
고등학교 이후로 난 여자친구들이 없어졌다. 남녀공학이지만 공업 고등학교라 기계과에는 남자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라는 게임이 한국에서도 오픈했다.
어떤 친구가 학교에 노트북을 가져와서 게임을 하는 데 난 그 게임이 너무 흥미로웠고,
이 게임은 내 고등학교 생활을 펴준 흔히 말하는 일등 공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내가 담배를 처음 피게 된 나이였다.
누가 권해서 시작한 게 아닌, 내가 직접 달라고 해서 피게 됐다.
우리 과 건물 1층 화장실 마지막 칸은 선생님들도 인정한 우리의 빵터였다.
선생님들도 거기서 담배를 몰래 피라고 했고, 뒷정리만 확실하게 하라고 하였다.
아마 선생님들도 우리에게서 답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멋으로 시작했고 지금은 습관이지만 아직도 멋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밤새도록 열중한 ‘리그 오브 레전드’ 난 브론즈 630점부터 6개월 안에 플래티넘을 찍는 쾌거를 맛 봤고,
모든 기계과 학생들과 그 주변 친구들 귀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그렇게 난 친구들과 피시방 대회도 함께 나가고, 포천 친구들과도 알게 됐으며, 많은 애들이 나와 게임을 하기 원했다.
이렇게 난 이 게임 덕분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고 모두 나를 좋아해줬었다.
-고등학교 3학년-
우리는 수능을 보는 반과 취업을 가는 반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난 대학엔 1도 관심이 없었다. 갔으면 돈만 날릴 것이 명백했다.
학교에서 따야만 하는 자격증 공부, 난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CAD도 많은 칭찬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흥미는 내게 생기지 않았었다.
꿈이 뭐였냐고 묻는다면, 난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가정을 꾸리며 해외 여행을 다니는 삶.. 그게 내 꿈이었다.
그리고 난 그 평범한 삶을 위해 산업 요원이라는 병역 의무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고 난 그걸 택했다.
여름 방학이 오기 전, 모두 자격증을 따고 각자 갈 길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는 군대 간부를, 어떤 친구들은 수능을, 어떤 친구들은 취업 준비를.
나는 산업 요원을 하기 위해 여름 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훈련을 받았고, 이 무렵 인성이와 무척 가까워졌으며
쇼미더머니 2 가 방영을 하고 있었을 때이다.
‘쇼미더 머니2’ 내 편견을 깨준 하나의 TV 방송 프로그램이다.
이 당시 난 무대라는 건 TV 음악 방송에서 하는 아이돌, 발라더 들의 무대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Rapper 라는 이들은 자유롭게 무대를 오가며, 자신이 뱉고자 하는 말들을 뱉고 욕도 하였다.
난 그 모습이 정말 멋있었고, 내게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난 내 기존의 꿈을 버리고 Rapper 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가사도 쓸 줄 모르던 애였고, Rhyme 이란 개념은 내 머리 속에서 생기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렇게 새로운 꿈을 품고 ‘대영정공’ 이라는 회사를 향해 나, 인성, 효섭이는 화성으로 함께 떠났었다.
우리의 함께 동거하고 못 볼 거 다 본 사이가 됐으며, 이 시점으로 우리 셋의 우정은 시작됐다.
스케이트 보드도 타고, 함께 주말에 의정부를 가고, 시간이 없어서 함께 샤워도 해보고..
기숙사는 돈을 아낀다고 보일러를 틀어 주지 않았으며 집 안에서도 입에서 한기가 나왔다.
6명이서 살았지만 우리의 짬은 맨 아래.. 2/1/3 으로 나뉘어 가장 작은 방 셋이서 나란히 전기 장판 위에서 잤다.
효섭이는 바닥에서 잠을 못 자겠다며 밖에 버려져 있는 매트릭스를 가져와서 잤었다.
우리는 함께 놀며 하나의 게임을 하였다. 그 게임이 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핸드폰으로 아무거나 하는 게임이었다.
난 내키지 않았지만 하였고, 그 결과 난 졌다. 그리고 효섭이는 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하였다.
그 무언가는 내가 좋아했던 애에게 카톡을 보내는 것..
난 그 친구의 번호도 없었지만 효섭이가 어떻게 알아내서 카톡을 한 것이었다.
그 여자 애의 프사가 ~이닭 같은 마지막 글자를 동물로 끝내는 것으로 기억하는 데
내 친구가 그걸 이용해서 막 카톡을 하였다. 그리고 내게 넘겨줬었다. 난 이어가려고 하였다 어리석게도..
이어가고 안 이어가고는 나의 능력이었지만 내게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은 없었기에.. 카톡은 끝이 났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난 내 친구들에게 내 사생활을 얘기하지 않게 됐다. 가끔 인성이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내 사생활이나 깊은 얘기를 꺼내진 않는다. 그건 나의 약점이 될 수 있으며, 놀림거리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이 내 머리속에 박힌 시기였다.
담배를 뚫는 것도 이 시점에선 문제가 없었다. 회사 유니폼을 입고 편의점을 가면 프리패스였다.
단지 흡연장에서 담배를 필 땐 눈치가 보였다. 우리는 19살이고 피면 안됐지만..
그래서 회사 옆 길목에서 피다가 회사 사장님한테 걸려 한 소리도 들었고, 결국 우린 점심에 주변 아파트 놀이터에서 피고 쉬었다.
12월, 회사에 사정이 안 좋아져서 회사에서 인원 감축을 한다고 발표하였고, 우리는 당연히 1순위 였다.
하지만 효섭이가 일 하는 부서의 힘이 강한 부장님이 우리를 막아주었고, 우리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자존심에 금이 갔고 짜증이 났다.
인성이는 우리에게 자기는 못하겠다며 먼저 관둔다고 우리에게 말을 하였고, 효섭이와 나는 고민했지만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우리 역시 관두겠다고 말을 하였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회사 사장님의 아들인 부사장님은 나를 잡았다. 부서도 옮겨주고 너가 잘하는 CAD 도 알려줄테니 남아달라고
난 거절하였다. 친구들도 없었고 연봉제라서 야근이나 추가 업무를 하더라도 돈을 조금밖에 못 받았었다.
그렇게 나와 인성이, 효섭이는 회사를 떠나며 20대를 맞이하게 된다.
20대 초
20대 초
집으로 돌아와 내가 처음으로 번 돈으로 처음으로 산 건 마이크와 오디오 인터페이스, 그리고 모니터링 헤드폰이었다.
돈이 없었기에 Beta58a 와 Scalet 2i2 로 시작을 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Cubase5 를 불법 다운하여 사용하였고, 일단 가사를 쓰고 뱉기를 반복했다.
저녁까지 이어진 내 녹음에 어느 날 옆 집에서 새벽엔 조용히 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하였고, 난 그 때 내 목소리가 옆 집에도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 목소리는 그렇게 죽어갔다.
20살 처음으로 시작한 알바는 병원 내에 있는 편의점이었고 시간은 야간이었다. 누나가 예전에 했던 곳이었고, 난 그걸 몰랐지만 사장님은 내 성을 보고
유추해내어 나를 합격 시키고 난 열심히 일 했었다.
가끔 물 사가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으면 일부러 바코드를 안 찍고 내가 가지거나, 후에 정산 시 부족한 금액을
그것으로 채워내곤 했었다. 난 20살 초반까지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엄마는 이사를 가자고 하였고, 우린 벽산 아파트에서 민락 주공 2단지로 이사를 갔다.
걸어서 30분 버스타고 10분 거리인 편의점을 난 멀다는 핑계로 관뒀다.
이때부터 난 밤 거리를 혼자 걷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 부용천을 따라 노래를 들으면서 걷는 게 정말 좋았었다.
가끔은 인성이 일 하는 곳에 놀러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새벽에 걸어 가기도 하였다.
이때의 역시 난 게임을 많이 좋아했고, 음악과 게임을 집에 쳐 박혀서 엄청 한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나에게 영장이 날라왔고, 21살 12월에 입대를 하였다.
In Army
21살
훈련소에서는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냈었다.
훈련소를 마치고 방공 학교로 갔고, 우연치 않게 고등학교 친구 두 명을 만났다. 서로 몰랐다.
난 방공 학교에서 내 인생의 첫 번째 독감 같은 감기에 걸렸다. 죽는 줄 알았다. 너무 아팠다.
몸이 다 나아질 무렵 국군 병원(?) 을 가서 치킨을 사 먹었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던 치킨이었다.
그리고 난 7 군단으로 향하였다.
처음 듣는 부대였다. 내 동기는 어리버리하고 답답했다. 일을 못했고, 폐급이라고 불렸다.
내 입지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 손으로 쓰긴 그렇지만 내가 귀엽다며 모두가 잘 대해줬다.
일병 1호봉 시절, 내무반에서 몰래 과자를 먹다가 선임한테 들켰다.
그 선임은 날 봐주겠다고 했지만 내 맞선임에게 말을 하더라.. 바로 털렸다.
그래도 난 계속해서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 선임들, 동기들, 그리고 간부들까지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날 좋아해줬다.
난 일병 3호봉(?) 까지는 열심히 내 주특기 공부에 몰입했었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후, 하지 않았다.
나에게 기대를 많이 걸고 천재라고 부르던 선임들은 나에게 많은 실망을 하였다.
그건 내 알빠가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공부를 안 하는 것에 실망을 했을 뿐, 나란 사람에 대해선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혼내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진지라는 곳을 간다.
한 소대가 맡아서 한 달 간 진지 생활을 하게 되는 데, 그 곳에서 난 울기도 하였고, 많이 혼났었다.
방탄모를 쓴 상태에서 망치로 내 머리를 두들기는 게 그렇게 서럽더라
진지 생활도 어떻게 해서 잘 끝났고, 우리 대대는 마음이 편지로 인해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내가 쓴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어린 애들이 들어올 수록 군대의 문화는 바뀌어 갔다.
난 운이 좋게도, 그 사이에 딱 걸쳐 있었고, 내 주특기 선임 두 명은 영창을 가게 됐으며, 후로 다른 중대로 옮겨졌다.
난 그렇게 분대장을 달았고, 많은 신뢰를 얻으며 군대 생활을 이어 갔다.
그 곳에서 어떻게 보면 난 성추행도 당했다. 그땐 깨닫지 못했지만 선임 중 한 명은 내 중요한 부위를 꼬집거나 움켜 잡기도 하였다.
난 성추행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었지만.. 지금 보니 성추행이었다. 또 군대에서 종현이 형을 알게 됐다. 내게 음악을 알려주고 힘을 주던 형이었다.
노래방에서 내가 랩 하는 것을 듣고 나에 대해 뭔가 느꼈다고 하며, 휴가 때 그 형 집에 놀러 가 내 음악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후임들과 동기들 함께 휴가를 맞추어서 건대 입구에서 놀기로 약속했었다.
난 그때 옷이란 건 제대로 입어 본 적도 없고 제대로 사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나가기 위해 첫 옷과 신발을 샀었다.
체크 무늬의 어떤 자켓과 회색의 진, 그리고 리복 농구화였다. 이때부터 난 패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아마 그들과 만난 후 집에 와서 내 패션이 쪽팔렸던 거 같다.
그렇게 난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군 생활을 끝마쳤다.
20대 중
23살
떼루와 라는 음료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효섭이라는 친구의 추천으로 인해 일을 시작하게 됐다. 여기서 2~3년 일을 했던 것 같다.
음악도 꾸준히 하고 있었고, 게임도 꾸준히 하고 있었고, 일도 열심히 했었다.
여기 매점 사장님은 겨울에 직원을 안 쓴다고 내게 처음에 당부했지만,
난 여기 일 하는 동안 겨울에 쉰 적이 없다. 아마 내가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24살
가을에 사장님이 자신은 관두고, 여기 건물주의 아들이 대신 운영할 것 같다고 내게 말을 하였다.
난 그 부사장님은 알고 있었고, 사적으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 분도 나를 좋아하셨었다.
우리는 패션을 좋아했고 신발에 대해 맞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사장님은 예전에 했던 핸드폰 장사를 할 건 데, 나에게 같이 할 생각이 있냐고 물으셨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준다고 하셨지만, 난 내키지 않았고 거절했다.
그렇게 그 사장님은 떠나고 건물주 아들 형이 맡았지만, 그 형은 이 매장을 운영할 줄 몰라서
내게 매니저와 같은 권한을 주셨다. 그렇게 난 매니저 일을 맡아 하며 새로운 알바 면접도 직접 하게 됐다.
25살
면접을 보다가 어떤 여자 아이를 뽑게 됐다. 내가 까였던 여자다.
이래서 외모도 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이 나오는 것 같다.
그 친구는 일을 그렇게 못하진 않았다. 그 아이는 오래 된 남자 친구가 있었고, 우린 그냥 대화를 나눴었다.
내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고, 평범한 일상적인 얘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일 관련 얘기로 메시지를 주고 받고, 어쩌다 보니까 우린 대화를 이어가게 됐다.
사실, 오랜만에 얘기했던 여자라서 좋았던 것 같다. 그 대화 자체에서 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웹툰, 드라마, 학교, 영화, 밥, 여행 그런 일상적인.. 난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걸 떠나서, 우리는 영화, 동물 카페, 방 탈출, 술, 마사지 카페와 사주를 같이 보는 등 다니며 놀았었다.
이 친구와 단 둘이 술을 마시는 데, 효섭이에게 걸려서 쪽팔린 기억이 있다.. 놀림거리가 됐었다.
그 여자 동생이 쪽팔린 게 아니었다. 그냥 내 자신이..
그 아이는 날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고, 나 역시 그 아이를 보고 가슴이 뛴다 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듣고, 공감하는 ‘척’ 하고, 그 여자애를 ‘착한 아이 증후군’ 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언제는 카페에서 이 친구가 자신의 옛날 얘기를 하면서 울컥 했던 기억이 있다.
난 공감을 해주지 못하고, 의미 없는 위로를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은 확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급발진을 박아버렸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멋이 없었다. 사귀자는 말을 했고, 왜 좋냐는 질문에, 난 얼버부리며 그냥 너라서 좋다 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차였다. 재밌는 건 뭔가 마음이 아프다거나, 답답한 기분은 없었다. 그냥 쪽팔렸다.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었는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 그 아이가 아니라 ‘여자’ 랑 노는 게 좋았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그 여자 아이는 내 인생에서 몇 년 떠나갔다.
그리고 떼루와 역시, 장사가 잘 안 됐고, 8월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됐다.
이 무렵 효섭이는 CGV 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새 직원을 뽑는 데
나와 경준이라는 친구를 추천해줬다. 우리는 같이 면접을 봤고 나는 떨어졌다.
쪽팔렸다. 면접 보는 방식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인싸와 아싸를 구분 지으려는 느낌이었다.
9월부터 난 백수였다. 집에서 음악을 하며, 게임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흘려 보냈다.
이렇게 나의 25살은 끝이 난다.
26살
우울증에 걸린 시기였다. 인성이의 추천으로 3월부터 물탱크 일을 시작했다.
1월부터 집에만 있던 나는 우울증에 걸렸고, 많이 울었고, 자살을 할 방법들을 생각할 때였다.
문득, 내가 죽는 다면 나를 위해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생각도 자주 했고..
모든 건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다. 힘들었던 시기였다. 3월에 물탱크를 시작하고 준성이라는 친구와 가까워졌다.
물론 사적으로 만나 따로 밥을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 친구와 출퇴근을 하며 의미 없는 토론들을 많이 했던 거 같다. 덕분에 잠깐의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일과 함께 평일 월, 수, 금 야간으로 카페 알바도 함께 했던 시기이다.
아마 새벽 3시까지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전동 킥보드를 하나 샀고 Limit 해제 하고 60km 로 달렸었다.
중간에 한 번 넘어져 무릎에 흉터가 남았지만 별 개의치 않았다.
음악을 위해 의정부 시내에 작은 작업실도 하나 구했었다. 방음 시설이 필요했고 준성이는 내 장비 옮기는 것을 도와줬다.
정말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말엔 동네에 있는 카페에서 오후 알바도 했었다.
모든 사람들과 사장님들은 항상 나를 신뢰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를 믿고 쉬러 간다. 대체 왜..?
그렇게 난 열심히 살았다. 물탱크가 끝난 후 야간 카페를 하거나, 작업실을 가서 작업을 하고 3~4시간 자고 다시 출근하고..
우울한 기분을 바쁜 일상들로 대체했다. 그냥 묻어뒀다. 노력했다. 극복하려고
동네 카페는 가을에 망했고, 야간에 하던 카페는 너무 피곤해서 4달 하고 그만 두었다.
남양주에 사는 음악하는 형을 만나러 자주 갔고, 별 일이 없으면 카페에서 책을 읽고
전시회를 가거나, 영화를 보고, 산책을 했다. 항상 혼자서 했다. 가끔 인성이와 효섭이를 보는 거 빼곤..
우리 셋은 항상 조용한 곳에 가서 술을 마셨었다. 시끄러운 곳을 싫어했고, 선호하지 않았다.
26살인가, 27살에 우린 함께 제주도에 갔었고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파티를 했었다.
거기서 여자 두 명과 잘 이어져서 함께 술을 마시고 2차로 우리 방에서도 함께 술을 마셨다.
난 술에 취해서 그냥 잠을 잤고, 그 넷은 계속 술을 마시고 바다를 보러 가 폭죽을 터뜨렸다고 한다.
난 중간에 일어났고, 혼자 밤 바다를 보러 향했다. 그리고 그냥 멍 때렸다. 그냥 그게 좋았다. 바람을 맞으면서 조용히..
다시 숙소로 돌아와, 사람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다시 술을 조금씩 마시고 난 잠에 빠졌다.
그 넷이 내가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말을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상관 없다. 난 그것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잤고 다음 날 5명이 함께 해장을 하고 그 분들과는 그렇게 작별했다.
27살
우울한 기분은 멈추지 않았다. 음악을 하면 너무 힘들었다. 목은 아프고 나아지지 않았다.
잊기 위해 게임에 더 몰두했다. 음악보다 게임을 더 우선하게 됐다. 더 우울해졌다.
함께 음악을 하던 형은 내게 나아가라며, 무대를 서라며, 앨범을 내라며 날 재촉했다.
난 그런 자신감도, 용기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냥 다 내려놓고 싶었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 형의 재촉에 난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Summervacation 이라는 가명으로.
그리고 난 허망하게 음악을 놨다. 더 이상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만 했다. 게임 속에 나를 가뒀다.
우울증은 게임에 덮히고, 난 새벽 3시, 4시까지 게임을 했다. 그리고 9시에 일어나 또 게임을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미래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게임에 몰두했다.
우울했지만 난 앞을 바라봐야 했고,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건 Fashion 이었다. 음악을 할 때도 난 오늘 하루 옷을 어떻게 입을 지가 더 설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알아보기 시작했다. 옷과 관련 된 일들을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알아봤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발견 한 LA Fasion 관련 취업 공고 글. 국가 사업과 연계가 돼 있는 그 공고에 난 이끌렸다.
그리고 들어가서 Form 을 작성하려고 하는 데.. 내게 있는 커리어는 뭣도 없었다.
음악과 게임만 하고, 물탱크도 정직원으로 일을 하지 않았던 내가 쓸 게 없는 건 당연했다.
빈 칸으로 스크롤을 내리고 마지막 자기 소개 칸에 난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인생을 담았었다.
그리고 제출했다. 2시간 뒤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너무 감명 깊게 읽었다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고, 대면 해서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난 기뻤다. 감사했다. 즐거웠다.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한 감정들이었고, 난 서울로 향했다.
그 분과 직접 만나고 대화를 하고 계획을 짰다. 그리고 미국에 가기 위한 수업들을 들었고, 나는 나 자신을 속여야 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내 경력을 들켜서는 안됐다. 나에게 솔직해져서는 안 됐고, 모두를 속여야만 했다.
10월에 수업이 시작 됐고, 난 영어를 처음 접하게 됐다. 생각보다 재미는 있었고 흥미도 생겼지만, 공부까지 할 흥미는 없었다.
그저 거기서 준비해준 미국 대사관 인터뷰 대본들을 보고 읽고 외우는 게 끝이었다.
그렇게 수업을 들으며 난 미국 회사에 면접을 보고 취업에 성공했고, 미국 에이전시 인터뷰도 통과했고, 정부에서 허락도 맡았다.
난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강해도, 눈이 많이 내려도, 추워도 모든 것에 감사했었다.
비자 인터뷰만 남은 상황이었고, 난 이미 통과라도 한 듯 친구들에게 자랑했었다.
그리고 인성이와 효섭이랑 함께 양양을 향해 갔다. 우린 게스트 하우스를 또 택했고 파티에 갔지만.. 남자 5명이 끝이었다.
그렇게 남자 5명이 놀고, 우리는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의정부로 와서 따로 술을 마시다가
효섭이와 인성이가 또 여자 2명을 꼬셨다.
난 굳이 내키지 않았었고, 난 집으로 향했다. 아마 그때 술을 같이 마셨다면, 지금의 나는 좀 다른 모습일까?
그렇게 그 둘은 그 재미에 빠졌고, 나 역시 그 친구들과 놀며 여자들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우리는 조용한 곳을 선호 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 우리가 여자들이 많은 술집을 찾아 다니게 된 계기가 됐다.
중학교 친구, 종욱이와 김륜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들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정확히 모르지만, 평택 LG 였나 SAMSUNG 이였나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노가다 현장인 것 같다. 술을 함께 마시는 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돈, 가정 그냥 흔한 일상적인 얘기들.. 거기다 술버릇도 노가다 아저씨들처럼 바뀌어져 있었다.
욕을 아무렇지 않게 씨발 씨발 거리며 길거리에서도 큰 소리로 말 하고.. 쪽팔렸다.
난 그렇게 이들과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생각해보니 욕을 안 한지 정말 오래 된 거 같다.
가끔 너무 힘들면 혼자서 하..씨바 라고 하긴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2024년의 난 욕을 전혀 하지 않게 됐다.
난 28살 1월에 잡힌 비자 인터뷰를 준비하며, 이렇게 27살의 삶은 끝을 내게 된다
20대 후
28살
비자 인터뷰 1차, 떨어졌다. 낙담하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비자 인터뷰 2차, 떨어졌다. 낙담하지 않았고 다음을 바라보게 됐다.
내 인생의 큰 틀이 바뀐 것 같았다. 전화로 내 결과를 알렸고, 난 그저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 난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머리 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캐나다, Plumber, 워홀
놓치지 않았다. 마침 누나도 한국에 휴가를 왔고, 내 비자 인터뷰 2차가 떨어진 그 날 동시에 캐나다 워홀 신청을 받기 시작한 날이었다.
난 바로 지원했다. 그냥 이끌렸다. 그래서 했다. 고민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갑자기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어졌었다. 고민은 없었다. 그래서 했다.
일기 역시 그냥 하고 싶어졌었다. 고민은 없었다. 그래서 했다.
그렇게 내 여정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내 우울증은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졌었다.
이 후의 여정은 내 Journey 에 담았다.
처음엔 빼 먹는 날도, 감정을 담지 않은 날도, 어떤 사건을 적지 않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완벽함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하고 있느냐 이다.
중요한 건 발을 담갔냐 이다.
2024
At the End of 2024
내 삶은 많이 달라져 있을까..
2024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난 모든 일기를 훑어 봤다.
처음 썼던 일기,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날 것의 느낌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필력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처음 영어 일기를 쓸 땐 Chat GPT 를 빌려서 쓰곤 했다. 지금 보니 참..
지금의 난 빌리지 않는다. 그래도 번역기에 틀린 게 있지 않을까 돌려 보고는 하지만
온전히 내가 쓰고 있는 건 다름 없다. 그리고 많이 나아졌다.
내 기상 시간은 4시 30분이다. 힘든 일을 할 때면 5시, 너무 피곤하면 6~7시 사이 늦잠을 자곤 한다.
Miracle Morning 이 아니다. 그냥 나의 습관이고 내 Routine 의 바뀜이다.
사람마다 생산적인 활동, 생각을 하는 시간은 다르다. 꼭 아침에 일어난다고 좋은 건 아니다.
단지, 이게 나에게 맞아서 하는 것이다. 새벽의 여유로움이 좋다. 아침에 급하지 않은 게 좋다.
여유로운 삶은 항상 내가 바란 삶이다. 모든 걸 급하게 하고 싶지 않다.
영어 공부는 이제 내게 습관이 됐다. 새로운 단어, 패턴을 배우는 것이 즐겁다.
제대로 자리 잡은 건 2024년 2월부터 인 것 같다. 그 전에 일기를 보니까, 해야지.. 해야지..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더라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다.
내가 꿈 꾸던 나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바랬던 그 모습.
중간에 무게를 올려 가며 몸을 키우고 싶었지만, 할수록 관절에 무리가 가는 느낌이었고
지금은 바벨이 아닌 덤벨을 이용하여 하고 있으며, 무게 보단 정확한 자세와 균형을 맞추고 있다.
그래도 캘거리에서 무리하게 먹고, 운동, 크레아틴을 먹은 게 도움이 됐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벌크업이 됐으며, 지금의 난 마른 근육질을 갖게 됐다.
운동 또한 습관이 됐으며, 강박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못하는 날은 못하는 것이다.
캘거리에서 시작한 명상은 누워서 시작해서 지금은 앉아서 5분, 5분에서 15분, 15분에서 30분으로 늘렸다.
지금은 30분도 짧게 느껴지지만, 내 시간을 위해 늘리지 않고 있다.
명상을 하며 미래도 그려보고, 생각도 정리 하고, 내면을 더 생각하고..
요즘엔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부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담배는 여전히 잘 피고, 술은 잘 마시지 않는다.
그냥 술은 더 이상 끌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마실 이유가 없다.
어떤 모임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됐다. 그저 사교적인 모임이라면 내게 단 하나의 의미도 없다.
난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 궁금하지 않다. 어떤 일상을 보내는 지 궁금하지 않다.
나가서 할 얘기도 없다. 할 말도 없다. 할 생각도 없다.
날 더 이상 불편한 장소로, 내가 불편을 느끼는 장소로 보내고 싶지 않다.
피할 수 없다면 감당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피할 수 있다면 안 피할 이유는 없다.
친구들과의 거리가 멀어져도 괜찮다. 나와 맞는 친구들은 남을 것이고, 맞지 않으면 떠날 것이다.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항상 바뀐다. 그래서 슬프다.
내가 통제 할 수 없는 것이 인간 관계이다. 그저 현재에 집중하면 된다. 끝을 보는 습관을 버리려고 한다.
뭔가 나만의 철학, 나만의 것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철학은 남을 통해 배우는 게 아니었다.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생각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철학 책들은 그 당시 사람들과의 생각 공유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일들을 겪을 것이다.
내 인생은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만들어가고 있다.
난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아슬아슬 하고 불확실하고 전형적이지 않지만 제대로 걸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반대에 있을 것이다. 내 심볼처럼.